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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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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온책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열린책들
2023년 03월 20일
연장정 / 416 면
978-89-329-2314-7 93890
러시아 문학
20,000
 
 
 

 
치밀하게 얽힌 세 가지 이미지,
철도, 칼, 그림을 중심으로 풀어낸 『백치』 강의

수십 년간 도스토옙스키를 파고들었으며 러시아 문학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온 석영중 고려대학교 교수가 『백치』를 해설한다.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로도 꼽히는 『백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쓰였고, 작가가 특별히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후기 대작 중 가장 서정적이고도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이 책은 『백치』를 어려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도스토옙스키 전 작품의 핵심 인자인 <이미지>에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백치』의 중심 이미지로는 철도, 칼, 그림을 제시하며 소설의 구조와 당대 러시아의 사회상, 작가의 전기적 궤적을 총체적으로 풀어내는데, 곳곳에서 연구자의 방대한 지식과 끝없는 애정이 맞물려 지나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가의 내공으로 정교히 구축된 『백치』라는 세계
그 구석구석을 충실히 그려 낸 도면

도스토옙스키가 여러 차례 밝혔듯 『백치』는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오랜 염원의 결실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주인공 미시킨 공작을 탄생시킨 이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질문,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영원 속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기도 하다. 『백치』라는 지극히 정교한 세계를 안내하는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소설이 어떤 개인적 고통 속에서 쓰였는가에서 시작해 방법론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 작가적 고통을 이야기하며, 그럼에도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숙원 사업이자 <유일한 구원 수단>이었기에 <반드시 써야 하는 소설>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형상화한다는 창작 목표에 다가가고자 그가 사용한 방법은 철도, 칼, 그림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소설에 들여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2~4부는 그것들이 수많은 이미지를 파생하고 복잡하게 얽혀 서사를 이끌면서 대가의 치밀한 설계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수렴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철도>는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과 물신 숭배 사상을 담아낸 이미지다. 러시아의 산업 혁명을 촉발해 새로운 부를 창출한 철도는 소설에서 상인, 신흥 자본가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그들은 재산 축적 방식과 계급, 계층을 막론하고 돈을 모든 가치 위에 두게 된 타락한 사회를 대변한다. 초월성이 부정되고 부르주아적 사고가 팽배한 가운데 철도를 위시한 첨단 기술이 신흥 종교로 부상하고, 부를 누리는 인간은 그리스도를 대체하며,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저울과 계약>의 시대가 도래한다. 
<칼>은 폭력, 죽음, 종말에 대한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이미지로, 처형과 살인이라는 테마를 활성화하며 시간과 무한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킨다. 사형수의 시간 체험을 첨예하게 묘사하는 이미지-서사들이 보여 주는바, 인간은 무한을 살기는커녕 인지하기조차 불가능한 존재다. 이런 인식은 『백치』를 꿰뚫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영원 속에서 살 것인가?> 한편 소설은 당대 살인 사건을 실시간 반영하고 칼과 살인을 반복해 다루며 나스타시야 살해라는 종막을 향해 치닫는다. 나스타시야는 어린양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를 환기한다. 3부는 결국 도스토옙스키가 칼, 살인, 시간의 모티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시간, <영원한 현재>를 말하고자 했음을 짚어 낸다. 
<그림>은 이미지를 시각적, 예술적으로 표현한 메타이미지로, <이미지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원칙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강생했듯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지로 나타내고자 했다. 소설 속 미시킨의 서예, 나스타시야의 초상 사진, 디다이와 칼라메의 풍경화, 모스타르트의 「이 사람이다」 등은 저마다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라는 핵심 이미지를 향해 융합된다. 「무덤 속의 그리스도」는 로고진에게는 투기 대상일 뿐이며 이폴리트는 거기서 처참한 시신과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 즉 죽음만을 발견한다. 같은 그림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본 것은 부활 가능성, 나아가 <눈에 보이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불멸>이었다. 그는 그려진 것에서 그려지지 않은 것을 읽어 낸 다음 소설 안에 구현한 것이다. 이제 그가 보이게 한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된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영원 속에서 살 것인가
어떻게 (……) 살 것인가

끝으로 이 책은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근원적인 창작 목적은 시간을 사유하고, 시간을 이를테면 《서사화》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다루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사유의 매개로, 이미지를 집필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그 결과물인 『백치』는 발표 후 한 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통찰을 발휘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시간을 사유하게 한다. 
이 책에는 평생 도스토옙스키를 천착해 온 연구자가 『백치』를 통해 삶과 시간을 사유한 자취가 뚜렷하다. <만일 우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 속에서 사는 것은) 가능하다.>(230면) <인간이 대시간을 살 수는 없겠지만 대시간을 추구할 수는 있다. 끝없는 대시간의 추구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지도 모른다.>(237면) <삶은 (……) 무상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흘러가 사라져 버리는 현재로서 살아 내야 한다.>(303~304면) 이 같은 사유 안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영원 속에서 살 것인가>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질문은 섬세하고도 담대한 걸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모두의 질문으로 나아간다. 어떤 윤리적, 미학적, 철학적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은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는 제목의 맺음말로 끝을 맺는다. 도스토옙스키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며 일생을 보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기에(「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희망을 잃었다가도 되찾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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