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청춘의 독서』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시절 누구나 한번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러시아 대문호 작품이라는 지적 허영의 발현으로 『죄와 벌』을 만났다.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죄와 벌은 도끼 살인마의 답답한 내면 고백이었을 뿐이었다. 감동의 회오리는커녕 두꺼운 책을 그저 숙제하듯 읽어 내려간 기억만 오롯이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유시민이 감명 깊게 읽었고, 그래서 죄와 벌이 『청춘의 독서』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서른 중반의 나이에 다시금 『죄와 벌』을 펼쳤다. 그것도 유난히 무더운 이 여름에 말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작은 항상 사소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사뭇 달랐다. 고등학생 시절의『죄와 벌』과는. 라스꼴리니꼬프-이하 로쟈 의 살인 동기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살인자  로쟈의 내면과 심리 또한 충분히 공감 할 수 있었다.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뒤늦게 발전을 시작한 근대의 러시아. 거대한 인식의 전환과 사회 구조의 변화에 방황하는 젊은 엘리트들. 야만과 진보가 공존했던 제정 러시아. 혼란의 한 복판에서 근대가 낳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로쟈의 살인은 그의 바람대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인간미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전당포 노파의 죽음이 가난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합리적 이성의 판단을 잣대로 삼는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기생충같은 한 인간의 소멸을 통해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식으로. 하지만 로쟈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본능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살인이라는 비인간적인 행동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진정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일까? 로쟈는 자수한다. 그리고 참혹한 환경으로 유배를 떠난다. 바로 시베리아였다. 극한의 시베리아에서도 로쟈는 쉽게 참회하고 속죄하지 못한다. 로쟈에게 유배지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특히 이성의 목소리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던 로쟈로서 유배지의 고통은 보통 사람들 그 이상이었다. 이론과 논리들은 그를 더욱 혼란속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그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소냐의 지극한 사랑. 그것이 로쟈를 구원했던 것이다.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본문 809쪽. 죄와 벌하/ 표트로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홍대화 역/ 열린책들

 그렇다. 로쟈의 깨달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의 현실을 살펴봐도 삶에 대한 그의 통찰은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인류는 과학혁명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를 통해 고도의 산업사회를 만들어 왔다. 진보라 불리는 행동의 기초는 합리성과 이성이라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발전한 인류의 현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면 이성과 합리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끔찍한 현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구환경의 파괴, 양극화로 인한 인간성 상실,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영혼이 부재한 삶. 인생의 가치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은 이 시대의 로쟈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이라는 도끼로 진정한 인간의 삶의 뒷통수를 내리치고 있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합리적 판단이라는 허울로 순수한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죄와 벌』의 메타포는 순수하고 진실된 삶에 대한 고찰이다. 변증법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합리성은 이제 그 수명이 끝나간다. 과학, 이성, 합리, 효율이라는 근대와 현대의 사고는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현재 지구촌 전반에 걸쳐 산적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해야 할 일은 인간 본연의 삶의 자세를 되찾는 일이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삶으로의 전환을 심각하게 고민할 시기다. 합리성의 광기로 광포한 도끼질을 멈추기 위해서 말이다. 소냐의 사랑은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그 사랑을 토대로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살인이라는 끔직한 과정을 통해 삶을 통찰했던 로쟈를 거울 삼아 우린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삶을 바라봐야 한다. 그 일이 결코 쉽지 않더라도 말이다. 진정한 사랑이 바탕이 되는 삶. 변증법이 아닌 삶 말이다.

심이아빠님 원문 보러 가기